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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0일, 미국 LA 카운티는 한국인 여성의 업적을 기리며 그녀의 이름을 그대로 넣은 'OOO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2016년 5월, 세계 최대 미국 주간지 타임(TIME)은 이 여성을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영웅(Unsung women of history)'에 선정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몇 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녀가 11살일 때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훌륭한 미국시민이 되어라. 그러나 절대 한국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남긴채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수산(安繡山, Susan Ahn Cuddy, 1915년 1월 16일 ~ 2015년 6월 24일, 미국 LA 출생), 그녀 아버지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평안도 강서군 출생)입니다.


<도산 안창호, 부인 이혜련과 가족>


안수산 여사는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야구, 필드하키등의 운동도 열심히 참여하며 2루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1940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1942년 한국인 여성 최초로 미국 해군에 입대합니다.



당시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첫 장교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재도전하여 합격, 동양인 여성 최초이자 미해군 최초의 여성장교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아시아인(한국인)이라는 차별과 함께 여성이라는 차별까지 감수하며 첫 여성 포격술 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왼쪽부터 안필영, 안필립, 안수산>


엄연히 미국 군인이자 장교였지만 백인 부하가 명령을 무시하기 일쑤인 상황을 견딘 덕분인지 일본어를 할 줄 몰랐지만 '한국어,영어, 일본어등 3개 국어를 할 줄 안다'는 뜻하지 않은 입소문이 퍼지면서 미해군 정보국에 배치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단지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암호해복 업무에서는 6개월동안 배제되는등 차별이 이어졌지만 능력을 인정받으며 마침내 암호해독을 맡게 됩니다. 안수산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인이란 이유로 군복을 입고 있어도 차별을 받았으며 정보국 내 비밀문서 일부를 볼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1946년까지 장교로 복무한 후에는 예편을 하면서 미국 국가안보국(NSA) 비밀정보 분석요원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의 냉전시대로 안수산 여사는 러시아 담당으로 300여명이상의 에이전트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1947년 4월, 프랭크 커디와 결혼 당시>


그녀는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고 결국 나중에는 모두가 나를 인정했다"라고 말했습니다. 1947년 4월에는 해군 정보장교 시절 알게 된 미국인 프랭크 커디(Frank Cuddy)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1959년 LA로 돌아온 안수산 여사는 1990년까지 지역에서 이름을 떨친 '필안스 문게이트(Phil Ahn's Moongate) 레스토랑'을 운영하였습니다. 이후 안수산 여사는 소장하고 있던 아버지 도산 안창호의 자료들을 기증하여 대한민국의 독립기념 사업을 도왔고, 미국내 한인교민사회를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군인으로서 미국 정부에 기여한 공적과 교민사회 헌신등이 인정을 받으면서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센터'에서 수여하는 '미국 용기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2003년에는 자신의 저서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의 출판기념회 등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2015년 6월 24일 LA자택에서 작고하였습니다.



안수산 여사는 결혼후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아들 '필립 안 커디'는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동포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MBC 예능 '무한도전-안창호 특집'편에도 출연하였습니다. 당시 안창호의 자녀중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 안녕필도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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