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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스포츠가 정신력(멘탈)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지만 특히 골프의 경우, 멘탈 게임이라고 불릴정도로 극도의 긴장감을 이겨내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라 불리는 스포츠 입니다.



여기 전설적인 프로 골퍼들과의 대결에서 최강의 멘탈을 보여주며 우승을 차지한 미국의 아마추어 골프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우승 덕분에 미국 골프 인구는 35만명에서 10년만에 200만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요.



그의 이름은 바로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  1893년 5월 8일 ~ 1967년 9월 2일. 미국 매사추세츠 브룩클린 출신) 입니다. 위멧은 1913년 US 오픈에서 아마추어골프 선수로 출전, 우승컵을 거머쥐며 '미국 아마추어 골퍼의 아버지'가 된 선수입니다.




그의 우승에는 단순히 아마추어 골퍼가 쟁쟁한 세계 정상 프로 선수들을 물리쳤다는 의미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뛰어 넘어선 인간 승리의 의미가 더해지며 더욱 드라마틱 한데요.


< 1913년 US우승 당시 '프란시스 위멧(위)'과 캐디 '에디 로디(아래)'>


사실 요즘에도 골프가 많이 대중화 되었다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실제 골프장(필드)에 나가서 경기를 즐기려면 평범한 샐러리맨의 경우 부담스러운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100년 전이라면 골프라는 스포츠와 일반 서민들과의 거리는 더더욱 멀 수밖에 없었는데요. 당시에 골프라는 스포츠는 소위 부유한 귀족층들만이 즐기고 할 수 있는 스포츠 였습니다.


가난한 천민이나 평민들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일 수 밖에 없었는데요. 위멧 역시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캐디를 하면서 골프 선수의 꿈을 키워나가야만 했습니다.


1910년대만해도 세계 골프 무대를 평정한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1985년 시작된 US오픈 역시 시작과 함께 16년 동안 모두 영국 출신 골퍼들이 우승을 차지하며 독보적 강세를 보였습니다.


어느 부문에서든 세계 초일류 강대국을 꿈꾸는 미국으로서 자국에서 개최하는 세계 골프 대회에서 다른 나라, 그것도 영국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우승컵을 계속 내주는 것은 그야말로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일 이었습니다.


< 1911년 & 1912년 US오픈 연속 우승을 차지한 '존 맥더모트' >


이러한 미국의 수모(?)는 1911년 종결 되는데요. 1911년 드디어 미국 선수인 '존 맥더모트(John McDermott. 1891년 8월 12일 필라델피아 출생.)'가 US오픈 우승컵을 그것도 역대 최연소로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맥더머트의 멈출줄 모르는 상승세는 이듬해까지 이어지면서 1912년 US오픈 우승을 차지, 2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미국 프로 골프의 자존심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US오픈에서 16년 동안 절대강자로서 독무대를 펼친 영국은 2년 연속 미국에게 우승컵을 뺏기며 역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미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미국에게 밀린 영국은 골프에서만큼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1913년 US오픈 대회에 영국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우승컵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선수를 출전시키는데요. 당시 세계 골프를 평정했던 해리 바든(Harry Vardon. 1870~ 1937)과 괴물같은 장거리 샷이 일품인 테드 레이(Ted Ray) 였습니다.


< 골프의 전설이 된 '해리 바든(Harry Vardon)' >


해리 바든은 1896년 당시 골프 지존인 존 헨리 테일러를 물리치고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차지한 뒤 승승장구하며 1900년 US오픈 우승을 이미 차지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정확한 아이언 샷과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스윙을 구사하며 현대 골프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전설중의 전설인 선수입니다.


당시 영국은 해리 바든에게 모든 경비를 다 지원해 줄테니 US오픈 우승컵만 되찾아 오라는 특명을 내리는데요. 당시 영국에서 열리는 '디오픈'에도 참가하는 바든이 6월에 개최되는 US오픈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영국은 미국에 US오픈 개최를 9월로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US오픈 역사상 처음이나 마지막으로 경기 개최를 9월로 연기하였습니다. 영국이 얼마나 자존심 회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리고 해리 바든이 얼마나 대단한 프로 골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대회 개최 일정 변경이라는 초유의 상황까지 불러온 '해리 바든'의 출전은 당시 미국내에서도 '올해(1913년) US오픈에서 미국 선수들은 2위 차지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게 하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자존심 대결, 그리고 전설 '해리 바든'의 출전 소식에 US오픈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때보다 뜨거웠기에 아마추어 선수 '프란시스 위멧'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과 언론은 당연히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왼쪽부터) 테드 레이, 프란시스 위멧, 해리 바든>


하지만 그에겐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운이 따라주고 있었습니다. 1913년 US오픈은 보스턴의 '더 컨트리 클럽'에서 개최되었는데요. 위멧은 바로 여기에서 11살때부터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배웠습니다. 그야말로 홈그라운드중의 홈그라운드인 셈이었죠.


또한 위멧은 1913년 6월, 지역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US오픈 직전에 개최된 전국 US 아마추어 선수권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그의 최종 성적은 16위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연히 세계 최정상 프로 선수들의 경연장인 US오픈에는 참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미국 골프협회장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았고 개최지역 출신인 그의 출전이 대회 흥행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그를 특별 초청 선수로 지정하였습니다.


US오픈이 '해리 바든'의 출전으로 6월에서 9월로 연기되지 않았다면 위멧은 아마추어 대회일정과 겹치기때문에 출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전국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도 아닌 16위를 차지한 선수를 대회 흥행 도움 카드로 생각한 골프협회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US오픈에 참가할 수 없었던 선수였던 것이죠.


물론 프란시스 위멧의 우승으로 당시 미국 골프협회장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도 한 셈인데요. 될 사람은 어떻게 해도 된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고 해도 실력이 없다면 절대로 US오픈 우승컵을 들어 올리진 못했겠지만 말이죠.


뜻밖의 행운으로 US오픈에 출전자격을 얻은 위멧에게도 경기직전 불행으로 보이는 듯한 일이 찾아오는데요. 바로 함께 대회 출정 예정이었던 12살 캐디 '잭 로리'가 학교 선생님에게 발각되면서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 실제 '프란시스 위멧' 과 캐디 '에디 로디'(위). 영화 속 위멧과 에디(아래) >


가난한 집안의 위멧에게 제대로 된 캐디를 구할 돈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이 때 '잭 로리'의 친동생인 10살 '에디 로디'가 캐디를 자처하고 나섭니다. 골프백조차 들기 어려운 작은 체구의 에디를 보며 위멧은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요.


하지만 에디는 자신도 잘 할 수 있다며 위멧에게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위멧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캐디로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위멧은 당시 가난한 선수였기에 그의 골프백에는 10개의 클럽(골프채)만이 들어있었기에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가벼운 상태였습니다.


1913년 9월 드디어 US오픈이 개최되었습니다. 경기 초반 그 누구도 위멧을 주목하진 않았지만 지난 2년 연속 미국에게 우승컵을 선사했던 존 맥더머트를 제치며 영국의 우승 특명을 받은 해리 바든, 테드 레이와 함께 연장 결승전에 진출하자 미국의 시선은 그에게 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멧은 캐디 '에디 로디'와 함께 차분하고 끈질기게 승부를 펼쳐 나갔습니다. 최종 합계 결과, 테드 레이 78타, 해리 바든 77타, 그리고 프란시스 위멧은 72타를 기록하며 최종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아마추어 선수가 그것도 첫 출전하는 프로 무대에서 '해리 바든'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 대등한 모습을 보이며 우승을 차지하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 중년의 '프란시스 위멧' >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캐디를 거쳐 아마추어 선수로서 US오픈 우승을 차지한 위멧의 이야기는 전 미국에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당시 35만명이었던 골프 인구는 1922년까지 5배가 넘는 200만 명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그의 우승은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 졌는데요. '지상 최고의 게임(The Greatest Game Ever Played, 2005년)'에서 샤이아 라보프가 프란시스 위멧을 연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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